F1의 역사 1990 - 1999 Formula One



포뮬러원은
기술 발전에 있어서는 항상 선두의 자리를 달리고 있었다. 그리고 1990년대에 전자식 드라이버 에이드는 보편적으로 널리 알려졌다. 엑티브 서스펜션(1987년 로터스가 발견했음), 자동 기어박스(1989 페라리) 그리고 트랙션 컨트롤(1991 윌리엄스) 대회에서 필수 사항이 되었다. 90년대에 피트스탑에서 하는 새로운 연료 보충 시스템은 모든 레이스를 전력질주의 시리즈로 탈바꿈하는 계기 되었고 이로 인해 드라이버의 능력과 레이스 전략의 중요성이 동일하게 적용되었다. 92년부터 97년까지 르노의 엔진이 지배하였다.
 

1990년대 초반에는 가벼운 TV카메라를 차에 장착하는 것이 보편화되었다. 올라가는 시청률은 스포츠의 매력을 알리고 또한 전형적인 담배 공사보다 더 많은 스폰서들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안전성 향상은 일류의 자동차 제조사들이 수시로 자신들을 팀과 관련 지을 경향이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1980년대 후반, 아일턴 세나와 알랭 프로스트, 그리고 윌리엄스와 멕라렌의 경쟁으로 시끄러웠다. 1990년 초반 또한 그들의 경쟁은 비슷한 색깔로 지속되었다. 하지만 멕라렌에서의 지속되었던 긴장감은 세나나 프로스트 중 한 명은 팀을 떠나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고 프로스트가 기회를 엿보아 페라리로 이적했다. 만셀이 프로스트의 새로운 팀 메이트가 되었고 1990년 시즌 동안 세나는 멕라렌에서 평화로운 레이스를 펼쳤다.
 
1989년과 비슷한 패턴으로 세나와 프로스트는 1990년 드라이버 타이틀 경쟁을 위해 일본 GP에서 말 그대로 다시 부딪혔다. 세나가1990년 레이스에서 자신이 고의로 프로스트에게 질주했다고 나중에 고백했다. 그리고 많은 포뮬러원 관계자들과 선수들로부터 심한 비난 세례를 받았다. 그러나 세나는 프로스트보다 많은 점수로 챔피언십을 이겼고 프로스트는 2위, 멕라렌이 컨스트럭터즈에서 우승했다.

1991년 세나는 다시 한번 멕라렌과 함께 했다. 그의 주 경쟁자는 만셀, 지금은 다시 윌리엄스를 위해 운전하고 있지만 시즌 첫 세 개의 레이스에서 한 리타이어먼트는 세나를 따라잡기에는 너무나도 큰 갭을 만들어줬고 결국 만셀은 세나의 뒤인2위로 시즌을 마무리 했다. 한편, 알랭 프로스트는 페라리 자동차에 불만을 품었고 1992년도에 휴식을 선택했다.
 
1992년 니겔 만셀의 시즌이 드디어 찾아왔다. 그는 총 9개의 레이스에서 우승했으며 큰 마진을 두고 드라이버즈 챔피언십에서 우승을 하였다. 그리고 르노 엔진을 장착한 윌리엄스가 컨스트럭터즈 타이틀을 따내었다.

휴식을 취한 알랭 프로스트는 1993년 F1으로 복귀했다. 그는 미국에서 인디카 시리즈를 레이스하기로 한 니겔 만셀(데뷔시즌에 챔피언십을 획득함)을 대신해 윌리엄스에서 운전했다. 프로스트의 파트너는 데이먼 힐, 두 번의 세계 챔피언 타이틀의 주인이었던 그레이엄 힐의 아들. 한편, 아일턴 세나는 멕라렌에 남긴 했지만 멕라렌이 혼다와의 엔진계약을 성사시키지 못하고 별볼일 없는 포드와 계약을 맺은 탓에 시즌 내내 불만족스러워했다. 알랭 프로스트는 7개의 레이스를, 세나는 5개, 루키데이먼 힐은 3번의 우승과 미래의 스타였던 미하엘 슈마허는 단 하나의 레이스밖에 우승하지 못했었다. (당시, 젊은 미하엘 슈마허는 베네통에 소속되어있었다). 그 해, 알랭 프로스트는 자신의 4번째 챔피언십 우승을 획득하였고 윌리엄스는 다시 한번 더 컨스트럭터즈 타이틀 사냥에 성공하였다.

1994년 시즌 예선은 치열했다; 윌리엄스에서 알랭 프로스트의 은퇴로 그의 자리는 아일턴 세나에게로 넘어갔다. 그리고 세나는 재능 많은 데이먼 힐과 파트너가 되었다. 한편, 미하엘 슈마허는 베네통에서 포드를 몰았다. 멕라렌은 새로운  푸조 엔진에 높은 희망을 걸었고 페라리는 지난 3년간 게르하르트 베르거와 쟝 알레지와 있었던 좋지 않은 기억들을 지우려고 애썼다.

스포츠에서 안전성 향상은 큰 이득을 준 한편 지난 몇 년 동안 몇몇의 끔찍한 사고 소식은 지속되었다; 그 중 하나는 1986년 테스팅 중이던 일리오 안겔리스(이태리)의 죽음이었다. F1은 예전에도 그랬지만 지금까지도 위험한 스포츠로 알려졌지만 서도 목숨을 잃은 드라이버들은 잊혀지고 레이스 자체만 기억에 남게 되었다. 포뮬러 원 카의 속도는 불법 개량된 터보차지드 엔진, 타이어 폭의 줄임과 드라이버 에이드를 제거하는 등의 이슈를 마다하고 지난 8년간 지속적으로 향상되었다. 동시에 합성물은 자동차를 더 강하게 만들었고 트랙의 런-오프 구역은 차가 베리어에 부딪히기 전 속도를 늦추는 역할을 했다. 그리고 속도가 빨라질 때마다 의료시설들은 동행하게 되었다. 1994년 시즌 이후, 안전성은 더욱 더 중요하게 되었다.  FIA가 주된 리더십을 맡았고 F1매니지먼트 또한 이에 큰 기여를 하였다.  

포뮬러원 역사에서 산마리노 GP는 충격적인 주말로 남게 되었다:

주말의 시작은 좋지 않았다. 루벤스 바리첼로(브라질)가 연습도중 심각한 충돌사고로 의식을 잃었다. 바리안테 바사에게 빠른 속도로 다가가던 중 도로 경계석에 걸려 공중으로 부양되었고 도로 경계석의 1미터 안에 있던 타이어 벽에 부딪히며 차는 멈췄다. 그리고 그의 차는 한 바퀴 돌아 거꾸로 랜딩 했다. 이로 인해 바리첼로는 자신의 혀를 삼켰지만 의료진의 빠른 도움으로 그의 목숨은 건질 수가 있었다. 토요일 오후에 그는 부러진 코, 붕대 감은 팔과 찢어진 입술을 하고 다시 서킷에 나타났다.

예선에서, 롤렌드 라첸버거(호주)의 차 위에 프론트 윙 플랩이 떨어졌다. 이는 심각한 서스팬션 고장을 일으키며 공력 특성을 저하시켰다. 라첸버거는 다음 랩에서 컨트롤을 잃어 180mph의 속도로 벽을 들이받았다. 그의 심택 S941은 심하게 손상되었고 그는 충격으로 인해 두개골이 골절되어 병원에 실려간 후 사망했다.   

이 두 사건은 끔찍했다. 그리고 루벤스 바리첼로나 롤렌드 라첸버거를 존경하긴 하지만 이 둘 중 그 누구도 글로벌한 스포츠 슈퍼 스타는 되지 못했다. 허나, 아일턴 세나는 달랐다.

예선이 재개되고 난 후, 세나가 슈마허, 버거, 힐, 레토와 라리니를 무찌르고 폴 포지션을 따내었다. 아침에 있었던 드라이버 미팅에서 드라이버의 안전을 향상하는데 전력을 다하기로 한 드라이버들은 GPDA(그랑프리 드라이버 협회)를 형성하였다.  그리고 제일 연장자 드라이버임으로 리더의 자리를 자진해서 맡았다.

레이스의 시작에서, 레토의 베네통 B194가 급정거하여 페드로 라미의 로터스와 부딪혔다. 라미의 오른쪽 프론트 타이어를 포함한 충돌사고로 인해 생겨난 잔해들이 관중석으로 날아가는 바람에 4명의 관중과 1명의 경찰이 부상을 입었다. 세이프티 카가 배치되었고 세나를 리드로 슈마허, 버거, 라리니와 레이커넨은 다시 트랙으로 돌아갔다. 레이스는 5번째 랩에서 재개되었다. 슈마허로부터 떨어져 나오려던 세나는 3번째 자리에 있던 버거와 이미 2.586초 차이로, 그리고 4번째 자리를 지키던 힐과 5.535초 뒤지고 있었다. 7번째 랩 스타트에서 세나는 아직도 논쟁거리로 남아있는 이유로 탐부렐로에서 컨트롤을 잃어 시속 210 키로의 속도로 콘크리트 벽을 들이받았다. 충돌로 인해 부셔진 윌리엄스의 서스펜션은 뒤로 날아와 세나의 헬멧을 뚫고 머리를 강타하여 골절상을 입혔다. 차는 서킷 중간까지 미끄러져 내려갔고 세나에게서는 움직임이 전혀 포착되지 않았다. 헬리콥터 사진으로 보인 세나의 미세한 움직임에 약간의 희망을 가질 수는 있었다. 그리고 세계적으로 유명한 영국 신경외과 의사인 시드 왓킨스 박사와 포뮬러 원 레이스 의사가 짧은 시간 내로 현장에 도착했다. 세나는 즉시 병원으로 이송되었고 당일 늦은 오후, 세 번의 세계 드라이버즈 챔피언이었던 아일턴 세나의 사망소식이 전해졌다. 레이스 후, 호주 국기가 세나의 차에서 나왔을 때 사무치는 소식이 알려졌다. 세나는 만약 그가 레이스를 우승했을 경우 그 우승을 라첸버거에게 바치기로 계획했던 것이었다.

레이스 중 또 다른 두 개의 사고가 있은 후 피트 구역에 관한 규율에 즉시 변화가 이뤄졌다: 속도제한의 도입됨과 피트 크루가 필요하기 전까지는 반드시 차고 안에 남아있어야 한다는 규율이었다.

차에 중요한 변화를 주지 못했던 1994년도, FIA는 포뮬러 원 카의 렘에어 효과와 파워를 줄이기 위해 에어박스에 구멍을 뚫으라고 요구했다. 같은 이유로 예전에 사용해왔던 벤젠과 톨루엔을 합성한 레이싱 연료의 사용은 금지되었고 대신에 무연 휘발유와 같은 비슷한 성격을 가진 연료 사용을 허용했다. 다운포스를 줄이기 위해, 또한 차의 코너링 속도를 위해, 나무 판자가 차대 중간 하부에 설치되어 큰 부품들이 트랙으로부터 최대한 멀리 떨어지게 하였다. 만약 판자가 저항력에 의해 단 10mm의 두께로라도 소모된다면 차는 불법으로 간주되었다.

1995년부터 차의 디자인은 기준면을 따라야 했다. 그리고 자동차의 미니멈과 맥시멈의 저항력(예를 들어 조종석 입구 사이즈, 공력 특성 장치)에 강력한 제한을 도입했다. 또한, 맥시멈 엔진 배수량은 3.5리터에서 3리터로 줄었다. 변화는 아래와 같다. 드라이버들의 피난이 쉬워지도록 그리고 사이드 머리 충격을 최소화 시키기 위해 조종석입구가 넓어졌고, 그립을 줄여 코너링 스피드를 줄이기 위해 홈이 있는 타이어를 도입, 통풍이 잘 되고 코너링 스피드를 줄이기 위해 바디를 좁히고 공력 특성 다운-포스를 줄여 코너링 스피드를 줄이기 위해 요소와 윙 사이즈를 높이고 줄임, 그리고 자동차가 규율을 철저히 따랐는지 확인할 수 있는 측량법(예를 들어 윙과 바디워크의 무게 테스트를 통해 견고함을 완벽히 지녔는지 확인한다)과 완고한 저항력을 확인 할 수 있는 종합적인 방법을 도입했다.  이러한 변화들은 법에 규정되었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FIA는 지속적으로 포뮬러 원 카의 속도증가를 억제하였다.  

새로운 규율과 규정의 빠른 도입, 특히 1994년도에 도입된 규율과 규정들은 포뮬러 원의 세계를 더 복잡하게 만들었다. 미하엘 슈마허의 팀 베네통은 자주 FIA규정을 어기고 있었고 그 결과로 슈마허는 부분의 레이스에 참가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의 첫 세계 드라이버즈 챔피언십 우승을 위해 처절히 싸워야만 했다. 호주에서 있었던 챔피언십 클린칭 레이스에서도 그는 라이벌인 데이먼과 충돌하는 바람에 레이스에서 중도 탈락하면서까지 타이틀을 챙겼지만 그에 따른 논쟁은 피할 수 없었다.

1995년, 분위기는 어느 정도 차분해졌다. 슈마허는 윌리엄스의 힐과 데이빗 쿠사드(영국)을 이기며 그의 두 번째 드라이버즈 타이틀을 획득했고 베네통은 가볍게 첫 컨스트럭터즈 타이틀을 획득할 수 있었다. 캐나다 GP에서 페라리의 쟝 알레지(프랑스)가 유일하게 우승한 것만 빼면 사실상 두 팀이 사용했던 르노 엔진은 최고중의 최고였다.

1996년, 페라리를 재건하기 위한 계획 중 하나로, 쟝 토드는 베네통의 미하엘 슈마허를 1995년 자신의 팀에 있던 알레지, 그리고 버거와 바꿨다. 효과는 직접적이었다. 페라리와 함께 한 첫 해, 슈마허는 세 개의 레이스에서 페라리가 지난 5년간은 꿈도 못 꿨던 우승을 했다. 하지만 페라리는 유력한 챔피언십 후보가 아니었고 데이먼 힐이 타이틀을 획득하면서 3년간의 한을 풀었다. 세계 챔피언의 아들이 타이틀을 획득한 경우는 데이먼 힐이 유일했다. 윌리엄스 역시 쉽게 컨스트럭터즈 타이틀을 획득했지만 데이먼 힐과 디자이너 아드리안 뉴위, 또한 엔진 제조사인 르노가 1997년 이후에 떠난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난 후부터 윌리엄스의 1990년대 지배의 끝은 보이기 시작했다..

1997년, 두 번째 F1레이싱 전설의 아들의 타이틀 획득 소식이 전해졌다. 윌리엄스 소속이던 쟈크 빌뇌브, 질 빌뇌브의 아들은 4번째로 포뮬러 원과 CART챔피언십 타이틀을 획득한 드라이버이다. (다른 이들은 마리오 안드레티, 에머슨 피티팔디와 니겔 만셀이었다). 1997년 시즌은 1996년과 비슷하게 빌뇌브는 마지막 레이스에서 드라이버즈 챔피언십 타이틀을 확정 지었다. 한편, 미하엘 슈마허는 마지막 레이스에서 그의 챔피언십 라이벌과 다시 한번 충돌했다. 하지만 1994년 사건과는 달리 이 사건은 슈마허에게 등을 돌렸다. 레이스로 인해 지친 자신을 발견하기도 했지만 고의로 빌뇌브를 트랙에서 벗어나게 하려 했던 것이 알려지면서 슈마허는 챔피언십에서 탈락되었다. 

1997년 말, 르노는 F1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다음 2년 동안 드라이버즈 타이틀은 미카 하키넨의 활약으로 멕라렌-메르세데스의 몫이 되었다. 하키넨은 슈마허와 빌뇌브도 따라가기 힘들 정도로 독보적이었다. 1999년 시즌, 타이틀 전쟁은 더욱 더 만만치 않았다. 빌뇌브는 새로운 BAR팀에서 아무런 문제를 일으키지 않은 반면, 실버스톤에서 충돌사고로 다리를 부상당한 슈마허는 얘깃거리를 제공해주었다. 그의 팀 메이트였던 에디 얼바인은 2점 차로 미카 하키넨에게 패했지만 그의 노력은 페라리가 1983년 이후로 꿈 꿔보지도 못한 첫 컨스트럭터즈 챔피언십 타이틀을 획득하는 데에 큰 기여를 했다.

1990년대에 작은 팀들이 지속적으로 사라짐은 글로벌한 스포츠의 재정적인 요구를 채우지 못함에 이유를 둔다. 로터스와 브라밤을 포함한 몇몇의 큰 팀들 역시 그리드 상에서 사라졌다. 비용에 관한 논쟁과 펀딩에 관한 어려움은 새로운 시대에서도 지속될 것이다. 하지만 F1이 첫50년 동안 일궈낸 흥미진진한 액션들은 그 어느 스포츠에서도 찾아 볼 수 없을 것이다. 논쟁들은 극적이었지만 스포츠는 항상 더 재미있었다.   
 

시즌드라이버국적컨스트럭터베이스
1990아일톤 세나브라질멕라렌 혼다멕라렌 혼다영국
1991아일톤 세나브라질멕라렌 혼다멕라렌 혼다영국
1992니겔 만셀영국윌리엄스 르노윌리엄스 르노영국
1993알랭 프로스트프랑스윌리엄스 르노윌리엄스 르노영국
1994미하엘 슈마허독일베네톤 포드윌리엄스 르노영국
1995미하엘 슈마허독일베네톤 르노베네톤 르노영국
1996데몬영국윌리엄스 르노윌리엄스 르노영국
1997쟈크 빌뇌브캐나다윌리엄스 르노윌리엄스 르노영국
1998미카 하키넨핀란드멕라렌 메르세데스멕라렌 메르세데스영국
1999미카 하키넨핀란드멕라렌 메르세데스페라리이태리
 




덧글

  • 동굴아저씨 2010/09/10 16:25 # 답글

    산 마리노...
    ....
    이번에 국내에서 열리는 f1은 무사히 끝나기를...
  • afterabc 2010/09/14 18:09 #

    그러게말에요~ 제발 별탈없이 치뤄지길 바래요
  • giancarlo 2010/09/21 21:38 # 삭제 답글

    번역기 돌리셨나요? 어휘나 선수 이름이나 어색하네요;;
  • afterabc 2010/09/24 18:06 #

    절대 번역기 돌린것 아닌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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